나는 떨리는 손에 다시 힘을 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직 뭣도 한 게 없음에도 공연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심장이 콩닥거리고 어째서인지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 안 돼, 안 돼. 진정하자. 진정하자, 나.결국 나는 붓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떨리고 간격이 이상한 내 글씨를 보자 미지근해졌던 얼굴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라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으, 나대지마 내 심장….죄인 같이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 없이 앉아있자 앞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 괜찮아? 보고 받을 수 있겠어?”“으응…. 괜찮아. 보고 해줘.”“그럼 시작 할 게. 미안하다. 이번에도 적의 본거지는 찾아내지 못했어.” 그,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가 보고를..
“-이상이 지금까지의 상황이야.” 차가운 기계 속에서 눈을 뜨고 나서 들은 현재는 정말 터무니없고 두려운 것이라 나는 아무런 생각도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활기찼던 영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마치 내게서 무언가를 바라는 듯이.그녀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게 바라는 것이라면 뻔했다. 하나뿐이었다. 그 아이의 짐을 덜어주는 것을 바라고 있겠지. 내가 그 아이와 함께 떠나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을 바라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머리가 무거워져 고개를 푹 숙였다. 사과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다. “…응, 알겠어. 너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무서운 건 당연해. 도망치는 것이 죄는 아니야. 괜찮아, 메르체.”“….”“나는 일단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찾..
내 나이 23세. 고등학교 졸업 후 1년을 방종하게 보내버리고 부모님의 등쌀에 못 이겨 21세가 되는 날 사니와가 되기로 결심했다. 한 가지 말해두자면 내 집안은 이냥저냥 이곳저곳에 돌맹이처럼 널려 있는 평범한 집안이다. 그리고 나는 사니와라는 직업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애당초 내가 살던 2x년에는 사니와란 직업이 없다. 그런 내가 어떻게 지금 사니와로 일하고 있는지, 그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해보려고 한다. 때는 5년 전의 여름, 내가 아직 고등학생 2학년이었을 무렵이다. 1학기 2차고사가 끝나고 이제 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에어컨도 고장 나서 찌는 듯한 더위에 모두가 만두가 되어 익혀지고 있을 때다. 지금 생각하면, 아니 그 때 생각해도 정신 나간 행동이었지만 정말 교실은 사..
그나마 상황은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막의 태양 아래에서 꼼짝 않고 그늘 아래 서있느라 조금 체력은 깎여 나갔지만 그래도 심한 상태였던 야겐과 호타루마루가 그나마 기력을 회복한 것 같았다. 카슈는 여전히 중심 잡기 힘들어하며 헉헉대고 있었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않고 꼼짝 앉고 있었으니 조금은 괜찮아 졌을 것이다. 더운 공기에 점점 빨개지는 다른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시키리마루가 애매모호한 얼굴로 제안했다. “괜찮다면 다시 움직이지 않겠어…?” “…그렇네. 여기서 가만히 있는다 한들 해결이 되는 것도 아니고.” “카슈, 괜찮겠어?” 야겐이 물었다. 잠시 비틀거리던 카슈는 끄덕이며 긍정했고 남사들은 다시 움직이기로 하였다. 이시키리마루의 겉옷을 걷어내자 죽일 듯한 살기마저 느껴지는 태양빛이 ..
“그럼 출진합니다~.” “갔다 와.” 1부대 대장 카슈 키요미츠는 활짝 웃으며 제 주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곧 주변이 환하게 물들더니 사니와의 모습은 사라지고 키요미츠를 포함한 1부대는 낮선 환경에 서있었다. 문제는 그 낮선 환경이 정말 단 한 번도 실제로 본 적 없는 낮선 곳이라는 것이다. “어?” 누군가 뒤에서 당황스러운 소리를 내뱉었다. 카슈는 그저 멍하니 흔들었던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굳어 앞의 심히 낮선 자연환경을 바라보았다. 물과 같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래.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높이 뜬 강렬한 태양. 카슈는 제 하이힐이 모래에 묻히고 점점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곳은 사막. 현대든 과거든, 일본과는 수천 미터쯤 떨어진 곳의 자연이었다. * “…힘겹군.” 야겐이 숨을 몰아쉬..
“그래서? 도대체 뭔 꿈을 꾼거야?” 카슈가 열심히 핸드폰 화면을 두들기며 야스사다에게 말했다. 야스사다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마스크를 좀 더 올렸다. 노골적으로 대답하기 싫다는 행동에 카슈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다시 핸드폰 화면에 집중했다. 그렇게 보였다. 지금은 점심시간. 야스사다는 다시 보건실 침대에 앉아있었다. 때문에 키요미츠는 방금 전 일을 물을 겸 문안을 온 것이다. 그저 수면 부족 일 뿐이라지만 그래도 일단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는데 걱정은 해줘야하지 않겠나. 문안을 온 것치고 키요미츠는 야스사다에게 눈길 하나 제대로 주지 않은 채 게임만 하고 있었지만 딱히 야스사다도 다름없기에 둘 중 누구도 그에 대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저기, 야스사다~. 나 정말, 정말, 정말 신경 쓰이는데~..
“키요미츠, 키요미츠….” “…뭐야…?” 그 한 마디에 방금까지만 해도 떠나질 않던 막연한 공포가 흩어졌다. 잠이 깨기 시작했는지 이불에 쌓여 뒤척이는 키요미츠에게 힘없이 별 거 아니라고 대답한 뒤 나는 내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잠이 깰대로 깨 말짱한 정신이라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만약 졸렸더라도 잠들지 못할 것이다. 꿈의 내용은 그리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저 키요미츠의 꿈을 꿨다는 것뿐이다. 키요미츠가 꿈에 나왔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고 생각한다. 같은 유치원, 같은 중학교, 지금 같은 고등학교까지.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의 인생 대부분을 같이 보낸 녀석이니 한 번 쯤 꿈에 나와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나는 뒤척이다가 일어나 건너편 침..
끝이구나. 나의 편안한 생활이. 아니, 일하기 싫다는 그런 중요한 본심을 현현 직전에 깨달으면 도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이미 초기도가 무사히 현현하므로서 내 편안하고도 안락했던 견습 생활은 종이 쳤는데 말이다. 그러니 나는 점점 빛이 사그라들고 모습을 들어내고 있는 카슈 키요미츠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빛이 완벽하게 녹아내리고 등장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카슈 키요미츠에서 한 치 다를 바 없는, 붉은 제복과 하얀 피부의 카슈 키요미츠였다. 소년의 모습을 한 그 검은 어두운 주변을 순진하게 두리번거리고는 정좌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우리 둘에게 눈을 돌렸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지 그저 신기한 건지 몇 번 목을 가다듬던 카슈 키요미츠는 방긋 웃으며 나를 확실하게 바라봤다. 그 순간 나는 빨간 눈..
길고 긴,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은 선배님의 혼마루에서의 견습 기간이 끝이 났다. 2년이니 길다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짧다고 하기에도 애매한, 정말 왜 정부는 견습 기간을 2년으로 해놓은 건지. 어찌됐든 정확히 견습 시작으로부터 2년이 지난 오늘 11월 26일 나는 드디어 선배님의 혼마루를 벗어나 내 혼마루를 만들게 되었다. 내 혼마루라니, 경사스러운 일이지만 묘하게 기쁘지 않다. 어딘가 탐탁치 않은 내 표정을 보신 선배가 말하셨다. "얼굴이 왜그래? 다른 애들은 자기 혼마루 생겼다면서 기뻐하던데. 넌 또 뭐가 문제냐?""선배, 저는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이 아닙니다.""갑자기 뭐라는 거야?" 얌전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입이 꽤 험하신 선배의 독설은 오늘도 변함이 없었고 나는 익숙하게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