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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난무

[안미츠]너의 꿈을 꿨어

쟈근만월 2019. 2. 26. 18:08

 “키요미츠, 키요미츠….”

“…뭐야…?”


그 한 마디에 방금까지만 해도 떠나질 않던 막연한 공포가 흩어졌다. 잠이 깨기 시작했는지 이불에 쌓여 뒤척이는 키요미츠에게 힘없이 별 거 아니라고 대답한 뒤 나는 내 침대로 돌아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잠이 깰대로 깨 말짱한 정신이라 나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만약 졸렸더라도 잠들지 못할 것이다.

꿈의 내용은 그리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그저 키요미츠의 꿈을 꿨다는 것뿐이다.

키요미츠가 꿈에 나왔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고 생각한다. 같은 유치원, 같은 중학교, 지금 같은 고등학교까지.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의 인생 대부분을 같이 보낸 녀석이니 한 번 쯤 꿈에 나와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나는 뒤척이다가 일어나 건너편 침대의 키요미츠를 보았다. 금새 잠들었는지 머리끝까지 덮인 이불은 작게 색색대고 있었다.

키요미츠, 네가 나오는 꿈을 꿨어. 꿈을 꿨다고 해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내용에 나는 그저 이불을 주먹으로 꽉 쥘 뿐이다.


*


2교시가 끝난 후 쉬는시간. 나는 답답함에 못이겨 잠시 마스크를 내렸다. 후덥지근한 여름에 아무리 얇다 한들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있는 건 꽤 고역이었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았을 때 터지는 기침과 호흡곤란이 더 곤란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기관지가 많이 약한 모양이니까.

마스크를 벗고 작게 콜록거리던 난 결국 참다 못해 교시을 나와 복도로 나왔다. 복도도 공기가 그리 좋진 않았지만 적어도 밀폐된 교실 보다는 나아 그나마 숨이 트이는 기분이다.

창가에 비스듬히 서서 하동안 숨을 쉬고 있으니 더운 복도에는 점점 사람이 사라져 한산해 졌다. 복도는 좁아 사람이 사라지니 난 편했다. 다리를 쭉 뻗고 햇빛에 달궈지는 운동장을 보던 난 오늘 아침 키요미츠가 한 말을 떠올리며 뺨을 더듬었다.


‘확실히…. 조금 까칠하네.’


오늘 아침 키요미츠는 내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이유는 당연히 하나. 아무래도 며칠이나 잠을 잘 안자면 얼굴이 좀 보기에 심한 꼴이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내가 그 사실을 안 것은 오늘 아침, 키요미츠의 경악을 듣고 나서다.

거울을 볼 때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비명까지 지르는 건 아니지 않아? 바닥을 발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애당초 자지 못하는 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 때문이야, 카슈 키요미츠. 매일 밤마다 내가 흔들어 깨웠으면 조금은 알아차리라고.

키요미츠의 둔함은 익숙한 것이지만 참 이럴 때마다 싫어지곤 한다. 어째서 키요미츠는 이렇게 둔한 건지, 조금 신기하다 못해 짜증이 날 지경이다. 굳은 얼굴로 엄한 곳에 화풀이를 하던 나는 종소리마저 놓치고 교실로 들어오려던 선생님과 마주치고 말았다.


“어, 야마토노카미군…? 종이 쳤는데 밖에 뭘 하고 있는 거니?”

“죄송합니다.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어디 아프니? 얼굴색이 엄청 안 좋은데, 수업 들을 수 있겠어?”


선생님, 범인은 카슈 키요미츠입니다. 키요미츠한테 벌점을 내리고 봉사활동을 하게 해주세요. 물론 저는 빼주셔야 합니다. 저는 아무런 짓도 안 했으니까요.

걱정스러운 선생님을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흘 정도 잠을 제대로 못자서 졸려 쓰러질 것만 같았지만 그래도 수업을 빼먹을 순 없었다. 이제 곧 시험이고 키요미츠와 5만원 빵을 했기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중간에서 키요미츠보다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키요미츠 따위에 5만원을 뜯길까 보냐. 그리고 처음부터 없어. 5만원 같은 큰 돈.


“하지만 야마토노카미군, 얼굴색이 너무 나빠…. 곧 시험이라 선생님도 되도록 수업을 받아줬음 좋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몸 망치면 말짱 끝이다?”

“아, 정말 괜찮습니다.”

“안 될 것 같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선생님도 수업에 집중을 못하겠어. 보건실에서, 내 수업 때만이라도 좋으니까 좀 자다 오렴.”


선생님은 들고 있던 노트에서 작은 종이를 하나 꺼내더니 급하게 허가증을 써주셨다. 안 되는데…. 5만원 빵 이겨야 되는데…. 하지만 내 몸은 솔직해서 이미 종이를 공손하게 받고 있었다. 어째서 이렇게 솔직한 건지, 조금 내 몸의 솔직함이 싫어진다.


“감사합니다.”

“푹 쉬고 다음 수업 받으렴.”


이게 뭔 상황일까. 저 선생님이 원래 이렇게 제자를 아끼시는 분이셨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공손하게 종이를 꼭 쥔 채로 계단을 내려가 복도를 걸어 보건실에 도착해버렸다. 정말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구만. 이럴 거면 왜 붙어있는 거냐 너네 둘은.

문 앞에 서서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수업을 받을까 생각했지만 보건실이라는 명패의 힘은 컸다. 나는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자마자 눈이 마주친 보건실의 이름에 다시 몸을 돌리고 문을 열었다. 야마토노카미 야스사다는 나약하다.


“지금 수업시간-, 어머, 얼굴색이 왜 이렇게 나쁘니? 괜찮아?”

“저, 선생님 허가 받고 1시간만 쉬려고요.”

“그래, 그래. 코피는 안 터졌지? 공부 너무 열심히 했다가는 죽어. 저어기, 오른쪽 침대 비어있으니까 거기 누으렴. 1시간 지나면 깨워줄까?”

“네. 감사합니다.”


나는 허가증을 선생님께 내밀고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푹신하고 또 푹신해서 눕자마자 눈이 반쯤 감겼다. 나는 크게 하품을 몇 번하다가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1시간 뒤 나는 죽을 정도로 이 때 자버린 것을 후회하게 된다.

정말 자는 게 아니었어. 마지막까지 버텼다면…, 그랬다면, 그런 일은 되지 않았을 텐데….


*


잠이 들었다. 양호실에서 잠이 들었을 터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매케한 연기에 콜록거리면서 눈을 뜬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바싹 타버린 대지를 밟으며 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어디야 여기….”


내 눈 앞에 보이는 믿기지 못할 광경에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면서 알았다. 이 꿈이다. 항상 보는, 그런데도 항상 잊어버리고 마는 그 꿈이다.

눈앞에 있는 것은 밤하늘을 가리는 지독한 연기와 사람의 비명이 끊이질 않고 화재로 무너져 내리는 커다란 전통 여관이었다. 몸에 불이 붙은 채로 절뚝절뚝 걸어 나와 내 앞에서 픽 쓰러지는 허름한 남자의 모습이 무섭도록 익숙했다.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굳어서 비명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 남자의 죽음에 익숙해져 있었다. 도대체 왜…? 나는 도대체 지금까지 이 사람의 죽음을 몇 번이나 봐왔던 걸까. 지금까지 기억나지 않는 꿈속에서 몇 번이나 죽는 사람을 보고 또 가만히 무시해 왔던 걸까. 그리고, 혹시, 나도….

아직도 몸이 불타고 있는데도 꿈틀거리면서 신음을 뱉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기와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여관을 바라보았다.

들어갈까…? 여기서 멍하니 서있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니까, 일단 들어가서, 들어가서…. 들어가서 어쩔 건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긴 해? 아니, 이건 꿈이니까 아무런 이변도 없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쓰러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제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불타고 있을 뿐이다. 큰 충격에 그저 바라만 보다가 역한 냄새에 서둘러 그에게서 떨어졌다. 싫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되는 건….

그렇게 한심하게 망설이고 있는 때였다. 키요미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관 쪽에서, 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비장한 어조였지만 알 수 있다. 키요미츠의 목소리다.

왜 키요미츠의 목소리가 여관에서 들리는 거지? 묘할 정도로 선명한 키요미츠의 목소리는 비장하면서도 어딘가 고통스러워서 이미 나는 타고 있는 여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키요미츠의 목소리에 겹쳐서 또 다른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온다. 비명, 철이 서로 부딪히는 것만 같은 격렬한 소음, 누군가의 기합…. 이제 의미를 모르겠다. 하지만 키요미츠는 저 안에 있다. 확실했다. 이유도 근거도 없지만 난 그렇게 확신했다.

구하러 가야해…! 나는 아무것도 못하지만 키요미츠는 혼자 있으면 더 아무것도 못하니까. 키요미츠 같은 칠칠이는 옆에서 챙겨줘야 한다. 그래서 나는 여관으로 뛰어들었다.


“괜찮아, 이건 꿈이다…, 이건 꿈…!”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불길로 뛰어들었다. 역시 꿈인 건지 고통은 없었다. 그저 소름끼치는 비명과 역한 악취가 더욱 가까워졌을 뿐이다.

나는 일층의 모든 방의 문을 열었다. 키요미츠는 없었다. 그저 눈을 까뒤집고 쓰러진 남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마지막 방에서 나온 난 불타고 있는 계단을 보았다. 역시 1층에 없다는 건 2층에 있다는 소리겠지…. 하지만 아무리 고통이 없다한들 저렇게 다 불타 무너진 계단을 오르기에는 망설여진다.

쿵,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리는 계단을 바라보며 망설이고 있을 때 다시 귀가에 키요미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귓구멍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이 크고 선명한 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만 비명을 질러 버렸다. 하지만 부끄럽다며 멈춰있을 틈은 없다.


‘젠장!! 야스사다가 있었으면 좀 더…!’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하지 않았다라고나 할까, 마치…, 이건 마치….

무너지고 있는 계단을 뛰어올라 2층의 복도를 달렸다. 보이는 건 활짝 열린 어느 방이다. 저곳이다. 시체를 밟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나는 방을 향해 달렸다. 뛰어들었다. 보인 건 피투성이인 다다미와 푸른 하오리를 걸친 남자, 그리고….


“키요, 미츠?”


날이 부러진 검이었다. 피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그 검이 키요미츠로 보였다. 그리고 날이 부러진 그 검은 마치….


*


“키요미츠!!”


식은땀이 등 뒤에서 흘려 내렸다. 푹신해서 좋다고 생각했던 이불이 땀으로 젖어 기분 나빴다. 따뜻하고 밝은 공간에 나는 얼이 빠진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키요미츠는?


“야마토노카미군?! 왜 그래?”

“키, 키요미츠, 키요미츠가, 키요미츠, 키요미츠는?!”

“무슨 말을 하는 거니?”

“키요미츠는 어디에…!”


횡설수설 말을 하다가 옆에 있는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그래, 여기 학교. 키요미츠는 교실에…!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달렸다. 키요미츠 몇 반이었지?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나는 교실 하나의 문을 부술 듯 열어 재꼈다.

반의 모든 사람이 날 바라본다. 신경 쓰이지 않는다. 키요미츠, 키요미츠는? 천천히 교실을 둘러보다가 창가쪽에 앉은 키요미츠가 보였다.


“키요미츠…!”

“야, 야스사다?!”


키요미츠에게 다가가 그 몸을 안았다.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당황한 키요미츠의 목소리가 날 안정시켜 주었다. 나는 개나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듯, 어린아이가 숨는 듯 절박하게 그 어깨에 이마를 부비적거리며 중얼거렸다.


“키요미츠….”

“왜 그래? 그보다 땀…! 그리고 수업시간!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나, 키요미츠의 꿈을 꿨어.”

“아?”

“키요미츠의, 꿈을, 꿨다. 무서웠어. 정말로, 정말로 무서웠어. 다행이다, 무사해서….”


평소와 같은 키요미츠의 목소리에 점점 긴장이 풀려간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점점 안았던 팔에 들어간 힘이 빠지고 나는….


“졸려….”

“야, 야스사다? 저기? 야마토노카미씨?”

“….”

“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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